경찰 외에도 가정폭력상담소 등 여러 기관이 통합적으로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경찰이 가정폭력 피해자의 동의 없이 전문기관에 사건을 연계할 수 없다.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캡처 

 

“한 지역에 오래 근무하면 가정폭력 신고가 반복되는 곳이 있죠. 그런데도 피해자가 조사를 원치 않고 상담ㆍ보호도 싫다고 하면 연결해 줄 수가 없어요.”

서울 파출소에서 근무를 했던 경찰관 A씨는 이웃 주민들의 신고로 가정폭력 현장에 나간 경험이 종종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폭력 상황이 일단락 된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할 수 있는 조치는 매우 제한적이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상 피해자를 상담소ㆍ보호시설로 인도하려면 피해자 동의가 필요하다. 경찰이 아무리 상황이 긴급하다고 판단하더라도 피해자 동의를 받지 않고 이들 기관에 인도를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관련 정보를 넘길 수도 없다. “이웃 주민들 신고로 현장에 갔지만 피해자가 원치 않아 입건은 물론 상담ㆍ보호기관과 연결도 못해준 경우가 많다”는 게 A씨의 말이다.


지난 5월 서울 관악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이런 법제도가 낳은 가장 비극적 결말이었다. 피해 여성 B씨는 사실혼 관계인 남성에게 살해당하기 전 이웃주민 등에 의해 경찰에 5차례나 가정폭력 신고가 됐다. 하지만 B씨는 출동한 경찰에게 그때마다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진술한 것은 물론 상담 연계 조치도 거부했다. 만약 기관의 보호가 있었다면 비극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실제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28일 여성가족부의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부부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대응방법으로 응답자의 66.6%가 '그냥 있었다'고 답했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1%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을 사적인 영역으로 여겨 집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돼 무력감을 느끼거나 합리적 판단을 못 내리는 피해자의 상태 등을 그 이유로 든다. 박순기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반장(경감)은 “법은 피해자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피해자 동의를 받고 전문기관에 연계토록 하지만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는 문제가 생긴다”며 “지역 사회 안에 여러 서비스 지원체계가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속적이고 통합적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보 공유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삽화 가정폭력_신동준 기자/2018-10-28(한국일보) 

 

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몹시 안일하다. 여가부가 이달 초 내놓은 관련 가이드라인은 ‘경찰은 피해자의 처벌 의사에 의존하기보다 위험성을 판단해 사건을 처리하는 한편, 지원기관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매우 원론적인 내용만 담고 있을 뿐이다.

여성계는 가정폭력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정유미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부장은 “피해자 의사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피해자 동의를 받고 상담.보호 연계하도록 하는데, 피해자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피해자 인권 보호에 도움이 될 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부터 가정보호와 유지가 아니라 피해자 안전과 인권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